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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보다도 중요한 수코타이의 공헌은 대단히 가치 있는 사료를 후세에 남겨 준 것인데, '람캄행 대왕 비문'이 그것입니다.
사료가 부족한 동남아시아에서 이 자료는 그것 하나로도 수코타이의 존재 가치가 충분합니다고 느끼게 해 줄 정도입니다.
동남아시아에 남겨진 대부분의 비문이 왕위 계승과 전쟁, 의례 등을 주로 기록하고 있는데 반하여 람캄행 비문에서는 수코타이 시대의 왕권, 정치, 사회 제도, 종교, 생활사 등 다방면의 모습을 읽어 낼 수 있습니다.
또, 이 비문에도 기재되어 있지만, 람캄행 시대에는 수코타이의 고유 문자가 만들어졌으며, 비문도 이 새로운 글씨로 작성된 것입니다.
이 사료를 기본으로 해서 수코타이 사회의 여러 가지 모습을 살펴보기로 하겠다.
비문이 만들어진 것은 1292년이니 우리의 조선 왕조가 건국되기 100년 전이었다.
다음과 같이 시작됩니다.
내 아버지의 이름은 스리 인드라딧야(Sri Indraditya)이며 내 어머니는 쏘안(Soan)이고 내 형의 이름은 반 무앙입니다.
같은 자궁 속에서 나온 우리 다섯 명 중 세 명은 사내이고 둘은 딸입니다.
내 맏형은 어렸을 때 죽었다.
스리 인드라딧야는 수코타이의 건국자로 알려진 인물입니다.
앙코르 제국의 외곽 지대 한 무앙의 지도자였던 그가 앙코르 왕국으로부터 받은 칭호가 스리 인드라딧야였다.
그는 캄보디아의 공주와 결혼했습니다고 하는데, 그 여인이 람캄행의 어머니 쏘안이었는지는 불분명합니다.
스리 인드라딧야의 뒤를 이어 즉위한 사람이 이 비문에서 얘기하는 형 반 무앙(Ban Muang, ?-1279?)이며, 람캄행은 형의 뒤를 이어 세 번째 왕으로 즉위했습니다.
한 어머니 뱃속에서 나온 형제가 다섯임을 기록하는 것은 다른 여성으로부터 나온 형제들도 있음을 암시하는 것이며, 왕이 여럿의 여성을 거느리고 있었음은 당연합니다고 할 것입니다.
위의 비문 내용에서 보다시피 왕위는 형제로 이어졌다.
그리고 왕좌를 차지하게 된 정통성의 근거로 들어지는 것은 우선 자신의 용맹함이었다.
그는 아버지를 따라 여러 전쟁에 참가하고 공훈을 세우면서 실력자로 부상했습니다.
열아홉 살이 되던 해 중요한 전투에서 아버지를 위기에서 구해 내고, 아버지를 위험에 처하게 한 적군의 지휘관과 직접 맞붙어 물리쳤다는 내용을 자세히 얘기함으로써 아버지보다 뛰어난 용맹성을 과시합니다.
수코타이에서 훌륭한 군주는 용맹성에 더해서 윤리적 덕목도 완벽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강조되는 것은 부모에 대한 효도였고 공경이었다.
아버지가 살아 있는 동안 자신이 전쟁이나 사냥에서 얻거나 취한 것들 중에 가장 귀한 것은 모두 아버지에게로 돌렸다.
아버지가 사망하고 형이 왕위를 이었을 때도 그를 충실히 섬겼음을 밝히고 있습니다.
왕은 백성과의 관계에서 그들의 분쟁을 직접 심판해 주고 고충을 들어주는 자애로운 심판자였다.
그는 왕궁 앞에 종을 달아 억울한 백성이 그것을 치면 자기가 나서 문제를 해결해 주었다고 합니다.
조선 시대의 신문고를 연상하게 하는 이 제도는 흔히 람캄행 시대 왕권의 성격을 '가부장적'인 것으로 파악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좋은 증거로 사용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어려운 송사가 있을 때 왕이 개입합니다든가 백성들의 고충을 직접 들어주는 것은 신문고의 예에서도 알 수 있듯이 전통 시대에 드문 일은 아니었다.
이는 주달관이 캄보디아에서도 목격했던 바였다.
오히려 수코타이 시대 왕권의 성격은 매우 강력한 종교성과 결합되어 있었음이 특징이며, 동남아시아 사회에서 보이는 왕권의 보편적 성격에 매우 가까이 다가가 있었습니다.
적어도 그렇게 되려고 노력하고 있는 흔적이 보입니다.
동남아시아로 이주한 지 얼마 되지 않은 타이인들이 동남아시아화되어 가는 초기 모습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람캄행은 적극적으로 불교를 수용했습니다.
당시 실론의 소승 불교는 말레이 반도 북부에 자라잡고 해상 교역이 활발하던 나콘 시 타마랏(Nakhon Si Thamarat)에서 크게 발전하고 있었는데, 람캄행은 이곳에 수차례 사절을 보내 불교를 수입하고 저명한 승려들을 초빙했습니다.
불상을 조성하고 사원을 건설하는 일도 불교 발전의 후원자로서 당연히 뒤따르는 작업이었다.
그는 앙코르의 지배자들처럼 자신을 신적 존재와 일체화시키려는 작업을 하려 하지는 않았지만, 그렇게 하고자 하는 노력의 조짐은 보입니다.
그는 종종 고명한 승려가 좌정하여 불법을 강의하는 자리 위에 앉아 정사를 논하고 불교의 가르침 다르마(dharma)를 자신의 백성에게 전하며 자신의 광대한 영역 속에 들어온 다른 민족, 다른 나라로 부처의 가르침을 전파하는 자임을 자처했습니다.
그의 시대에 불교의 흐름이 소승 불교였던지라 대승 불교 신봉자인 캄보디아의 자야바르만 7세처럼 자신을 보살화하는 작업은 불가능했지만, 불교를 수용하고 발전시키며 가르치고 전파하는 과정, 특히 무력을 통해서 불법을 전파하는 과정에서 불법의 구현자, 더 나아가 불교 세계의 구현자라는 의식을 발전시킬 소지는 얼마든지 있었습니다.
이렇게 시작된 태국의 불교 왕권은 이후 왕을 짜끄라바띤(轉輪聖王)으로 인식하는 단계까지 나아가는(조흥국 2004b : 40) 기반이 되는 것입니다.
불교와 관련해서 비문에는 카티나(kathina) 축제가 비교적 자세하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승려들이 우안거(雨安居)를 끝내면 도성의 사람들이 몰려가 그들을 위로하고 시주하며 한 달여 동안 계속되는 축제가 시작됩니다.
이때 촛불 의식이나 폭죽놀이는 왕이 직접 주관했습니다.
주달관의 관찰기에 따르면 캄보디아의 왕도 높이 쌓은 단 위에 올라가 이런 놀이를 즐겼다고 합니다.
"불꽃은 100여 리 바깥에서도 보이며 폭죽 소리는 온 성을 진동시킨다[주달관(周達觀) : 「정삭시서(正朔時序)」].
" 쇠데스도 이 부분을 지적하면서 캄보디아나 수코타이에서 공히 보이는 촛불 의식은 인도에서 유래한 것임을 환기시키고 있습니다(Coedes 1968 : 208).
폭죽놀이는 중국으로부터 유래했거나 중국인들로부터 전해진 것임이 분명합니다.
말하자면 인도적인 것과 중국적인 것이 함께 나타나는 의식인 것입니다.
그러나 캄보디아나 태국에서 이 시기 화약이 전쟁에 사용되었는지는 아직 알려져 있지 않다.
불교적 왕권은 이전 시대 푸난이나 캄보디아에서도 보이던 토착적 신앙 체계에 의해서 더 강화되었다.
그 [Brah Khabun산] 정상에 살고 있는 신성한 정령은 이 왕국 내의 그 어떤 정령보다 강력합니다.
수코타이의 어떤 지배자든지 그 정령을 잘 모시고 따른다면 나라가 유지되고 번성할 것입니다.
그러나 제대로 복종하지 않습니다거나 제물이 적절치 않을 때 정령은 더 이상 이 나라를 보호하지 않을 것이며 나라는 결국 멸망할 것입니다.
용맹성과 도덕성을 체현하는 왕권하에서 번성하던 수코타이의 경제적 면모는 "물에는 생선이, 들판에는 쌀이 가득하며 누구든지 자유롭게 무역하러 다니고 통행세는 거두지 않았습니다"고 표현됩니다.
금과 은이 유통 수단으로 사용되었다.
상속 제도도 전하고 있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남녀 균분 상속이 아니라 아들에게 재산 승계권이 있음을 밝히고 있습니다는 것입니다.
람캄행 비문의 이 내용은 남녀 간 상속권이 동등했던 것을 전통 시대부터 현재까지 이어지는 동남아시아의 중요한 특징으로 생각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고개를 돌리고 싶어하게 만들지도 모른다.
그러나 타이인들이 운남 지역으로부터 동남아시아로 내려온 지 얼마 되지 않고 이주 기간 동안 형성된 '유목적(nomadic)' 습성, 잦은 전쟁 등의 경험을 생각합니다면 아직 여성에 비해 남성의 권위 및 지위가 강하게 남아 있었기 때문인 듯합니다.
태국의 역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고 짜오프라야강 유역에 안정적으로 정착하면서 남녀 관계도 점차 '동남아시아화'되어 갈 것입니다.
귀족, 관료, 평민 등의 존재가 언급되고 승려, 농민, 상인, 장인, 군인 등의 직종도 나타납니다.
그런데 노예의 존재가 보이지 않는 것은 흥미롭다.
정말로 수코타이에서는 노예가 없었는가? 아직 정확한 답은 없습니다.
단지, 대규모 경작보다 약탈 및 조공물에 더 의존했던 수코타이에서는 캄보디아나 이후 짜오프라야강 중류에 자리잡는 아유타야에 비해 노예가 덜 중요했을 수도 있습니다.
수코타이는 노예가 존재하지 않는 나라였다고 확신하는 사람들은 주변국의 노예들이 이 나라로 도망치면 자유인이 될 수 있었습니다는 주장도 합니다.
나라의 이름에 자유를 의미하는 '타이'가 붙은 것은 그 이유 때문이었다는 것입니다.
비문은 수코타이가 약 7㎞ 길이의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었습니다고 하는데(그 안쪽으로 두 개가 더 있어 삼중의 성곽입니다), '수코타이' 또는 '무앙 수코타이'란 이 성곽 안의 공간을 가리킨다.
즉, 만달라 세계 속의 권력 중심부가 되는 곳입니다.
성곽 안에는 큰 연못이 있고, 동서남북으로 네 개의 문이 나 있습니다.
북문 쪽으로 큰 시장이 있었습니다.
국가 통치 기구, 즉 관료 제도나 군사 제도에 대해서는 확실히 알 수 없지만 중앙과 지방 또는 수코타이와 주변 속국과의 관계는 다음의 기술에서 명료하게 나타납니다.
누구든지 코끼리를 탄 자가 보러 와서 람캄행의 보호하에 자신의 나라를 두고자 합니다면, 그를 매우 친절하게 대우하고 보살핀다.
코끼리도 없고 말도 없고 인력도 없고 땅도 없고 금, 은 같은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할지라도 [자격 있는 자라면] 그를 도와 나라를 세우게 해 준다.
후견인 - 피후견인 관계 성립의 전형이 드러나 보입니다.
수코타이 영역 내 국가의 모습은 왕이 자신의 사람을 보내는 것이 아니라, 그 반대로 기존의 지배자 또는 실력자가 수코타이 왕을 찾아오는 형태였다.
찾아온 실력자가 복종할 것에 동의하고 왕이 보호를 약속하면 중앙과 지방, 또는 중앙과 속국의 느슨한 주종 관계가 성립했습니다.
와이엇은 이런 관계가 수코타이 핵심부에서도 그대로 적용됩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수코타이 성곽 내부를 제외하고, 그 주변 지역 역시 아직 독립된 무앙들이 흩어져 있었고 전통 지배자들이 그들을 관할하고 있었습니다는 것입니다(Wyatt 1984 : 56).
이렇듯 지배자와 피지배자 사이의 개인적인 관계로 연결된 람캄행의 영역은 (비문에서 주장하는) 짜오프라야강의 라보를 포함해서 동쪽으로는 현재의 비엔티안(Vientaine), 서쪽으로는 버마의 남부에 해당하는 페구(Pegu) 지역, 남쪽으로는 말레이 반도 북부의 나콘 시 타마랏(Nakhon Si Thamarat), 북쪽으로는 라오스의 루앙프라방(Luang Prabang) 지역까지로 해석됩니다(Tarling 1992 : 169).
그러나 이런 지배 영역 범위를 그대로 받아들이고 넘어가기가 쉽지 않다.
비문에서 이야기하는 북쪽, 즉 루앙프라방이 있는 곳은 지도에서도 금방 확인되듯이 정확하게 말하자면 북동쪽이고, 정북쪽으로 또 다른 강력한 따이 왕국들이 비슷한 시기에 출현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는 응암 무앙(Ngam Muang)이 지배하는 파야오(Phayao) 왕국이었고, 그 위로 현재 치앙마이에 중심을 둔 란나(Lan Na) 왕국이었다.
란나는 간단하게나마 소개하고 넘어갈 필요가 있습니다.
이 왕국은 19세기까지도 존속했습니다.
근대로 진입하기 이전에 태국으로 병합되어 버린 바람에 태국의 역사는 수코타이를 중심에 두고 전개된 것 같지만, 사실은 북쪽에 란나('수많은 논'이라는 뜻) 왕국이 줄곧 존속했고, 짜오프라야강을 따라 수코타이, 아유타야, 톤부리, 방콕 왕조 등이 교체되는 형태였다.
때문에 역사 서술의 계통상 수코타이가 태국 최초의 왕조 같지만, 13세기의 상황만을 놓고 볼 때는 현재의 태국 영역에 따이인에 의한 강력한 초기 왕국으로 수코타이와 란나가 성립되었던 것입니다.
란나의 건국자인 망그라이(Mangrai, 1259-1317) 역시 람캄행만큼이나 강력한 따이 지도자였다.
그는 몬족의 하리푼자야를 멸망시켰고 1290년부터 시작된 수차례의 몽고군 침입도 격퇴하면서 몽고군을 운남 남부까지 몰아붙이기도 했습니다.
람캄행의 수코타이와 란나 및 파야오는 경쟁보다는 상호 협력 관계를 유지했던 것 같다.
이 세 나라의 지도자들이 한데 모여 혈맹 의식을 행한 사실은 유명하며, 이런 의식을 통해 따이인들이 종족적 일체성을 확인한 것으로 해석되기도 합니다(Wyatt 1984 : 47).